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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문수벌의 푸른 파도와 1,100만 원짜리 계산식
제6화: 문수벌의 푸른 파도와 1,100만 원짜리 계산식개막전을 사흘 앞둔 목요일 오후 서울 피닉스의 전용 훈련장인 '피닉스 파크' 클럽하우스의 공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서늘했다. 터키 안탈리아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수단 내부를 짓누르는 긴장감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즌 첫 공식 경기 그것도 지난 시즌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린 '동해안의 절대 맹주' 울산 호랑이들과의 원정 개막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베테랑들의 눈빛부터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오후 전술 훈련이 끝난 직후 샤워실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 아래 서서 나는 오른쪽 정강이와 허벅지를 연신 쓸어내렸다. 터키에서 루빈 카잔의 거구 보리스에게 긁혔던 상처는 딱지가 앉아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근육 깊은 곳에..
2026.10.13 -
제5화: 귀국, 그리고 키보드 불바다
제5화: 귀국, 그리고 키보드 불바다안탈리아의 지중해 칼바람을 뒤로하고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발을 디딘 것은, 뼈가 욱신거리는 혹독한 전지훈련이 끝난 지 이틀 뒤였다. 입국장 자동문을 빠져나오는 선수들의 얼굴에는 긴 비행의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전지훈련 마지막 날 루빈 카잔을 상대로 극적인 1골 1도움 역전승을 거두고 돌아온 선수들의 어깨에는 미묘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특히 찢어진 축구화를 신고 골망을 갈라버린 나를 향해 2년 차 선배 배성현은 공항 로비를 걸어 나오는 내내 혀를 내둘렀다. "야, 강도진. 너 진짜 철면피다. 감독실 앞에서 울고불고 떼쓴 게 엊그제 같은데, 거기서 칩샷을 올릴 배짱은 어디서 난 거냐? 보리스 그 곰 같은 새끼가 네 슛에 쪽팔려서 잠이나 제대로 잘는지 모르겠..
2026.10.12 -
제4화: 지중해의 혈투와 찢겨진 축구화
제4화: 지중해의 혈투와 찢겨진 축구화 후반 11분, 배성현의 동점골이 터진 직후 전광판의 시간은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흘러갔다.1-1.친선 연습경기라는 허울 좋은 간판은 이미 경기장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벤치 앞 터치라인까지 뛰어나온 루빈 카잔의 감독은 핏대를 세우며 자국어로 험악한 욕설을 퍼부어댔고, 러시아의 거구들은 동양의 풋내기들에게 동점골을 헌납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힌 듯 살기를 뿜어냈다. "도진아! 멍때리지 마! 저 새끼들 눈 돌았다!" 하프라인으로 복귀하던 배성현이 내 등을 강하게 치며 경고했다.그의 말대로였다. 내게 공을 가로채이고 동점골의 빌미를 제공한 195cm의 센터백 보리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는 명백한 적의와 파괴욕이 ..
2026.10.09 -
제3화: 0원짜리 지옥과 미래의 가치
제3화: 0원짜리 지옥과 미래의 가치 터키 안탈리아의 지중해 칼바람은 잔디를 사정없이 얼어붙게 만들었고, 선수들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바늘처럼 파고들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어진 지옥의 동계 훈련 캠프.아침 6시 살얼음 낀 해변가를 달리는 크로스컨트리를 시작으로, 오전에는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체력 훈련, 오후에는 뼈와 뼈가 부딪히는 11대 11 전술 훈련, 그리고 야간의 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 축구부 시절의 훈련량도 혹독하다고 자부했었지만, 프로 1군의 동계 훈련은 차원이 달랐다.선수들의 눈에는 피로가 아니라 언제 방출될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근육통도, 감독의 불호령도 아니었다. 지독하고 냉정한 '수당의 현실'이었다..
2026.10.08 -
제2화: 야생의 라커룸과 계산기
프로 구단의 라커룸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코를 찌른 것은 고등학교 시절의 땀 냄새가 아니었다.비싼 스포츠 테이프의 접착제 냄새, 고급 마사지 오일,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팽팽한 살기. 서울 피닉스의 클럽하우스는 겉보기엔 화려한 호텔 같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로마의 검투사 콜로세움 지하 대기실과 다를 바 없었다. "신인들, 이쪽으로." 매니저의 손짓에 따라 나와 몇몇 드래프트 동기들이 구석 자리로 몰려갔다.라커룸 한가운데, 가장 넓고 샤워실과 물리치료실이 가까운 상석에는 베테랑들과 주전급 선수들이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서울 피닉스의 주장이자 국가대표 주전 센터백, 별명이 '벽(Wall)'인 서태훈. 190cm가 넘는 거구에 흉터..
2026.10.07 -
제1화: 잔디 냄새와 빚더미
제1화: 잔디 냄새와 빚더미 사람들은 묻는다. 축구가 왜 좋으냐고.푸른 잔디를 가르는 짜릿한 스피드? 골망을 흔들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환호? 동료들과 얼싸안고 흘리는 감동의 눈물?그런 낭만적인 헛소리는 배부른 놈들이나 지껄이는 대사다.내게 축구공은 굴러다니는 돈다발이었고, 네모난 골대는 그 돈을 털어 넣는 현금인출기였다.코를 찌르는 매캐한 담배 연기와 쉰 곰팡내.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우리 집은 세상의 밑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원인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진부한 단어 하나였다. 보증.아버지가 평생을 믿었던 고향 친구라는 작자는 아버지의 인감도장이 찍힌 서류를 들고 해외로 날랐고, 남겨진 건 8자리의 빚, 그리고 사채업자들이 매일같이 현관문에 락커로 칠해대던 붉은 글씨뿐이었다. "강도진! 네..
2026.10.06